아련함이 주는 간절함

Writings 2005. 5. 27. 14:37

<기억할 수 없는 것들> 2002. 12. 24 쟝르: 수필

언젠가부터
술을 마시면 글을 쓰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
밀려오는 수많은 감상의 편린들이 나의 가슴을 후벼파내어

공허할 정도로 텅비어 버린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나는 두꺼운 노트를

열심히 채워 나갔다
.
적어 놓지 않고는 견딜수 없었던 수 많았던 사연들
...
그러나 지금은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
.
왜 그토록 나의 마음이 시렸는지가
.

요즈음 술을 마셔도 아무런 생각이 없다
.
그저 잠시 기분전환을 위해 그냥 마신다
.
별로 흥분하지도 별로 취하지도 않는다
.
취하는 것도 별로다
.
취해보았자 한다는 짓이 더욱 자극적인 쾌락의 터널로 들어가는 일뿐이니
.

만일 내가 옛것을 다 기억해 내면

난 옛날 습관처럼 술을 마시면 울겠지
.
도무지 견딜 수 없이 멍뚫린 가슴 부여안고 울게다
.
그래서 다행스럽게 나는 마음을 놓는다
.
내가 아직도 그런다면 내 아이나 주위의 많은 사람이 힘들테니
...
기억할 수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

오늘

내가 기억할 수 없는 것(?)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

여섯 살

엄마의 월남치마폭을 붙들고 시장통을 따라 다닐때

어머니께서 팔던 쿨민트 껌의 향기가 도무지 견딜수 없이 강하게 느껴진다
.
바람은 차고 생선비린내가 진하게 퍼진다
.

열두살

개천가 모래사장에서 넓다란 삽으로 모래를 퍼올리던

아버지의 굵은 팔뚝과 힘줄. 강변의 풋풋한 물내음. 적막한 푸른하늘
.

열일곱

정액냄새 풍기는 다락방에서

온갖 만화와 플레이 보이 잡지로 세월을 보내다 심심하면

무협지도 읽고 데미안도 읽었지
.
근데 왜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은 날 늘 불안케 했을까
?

내 스믈즈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기을 바라면서도

왜 늘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어도 가슴에는 하나가득 슬픔뿐이었을까
?

왜 태양은 가득히 떴는지

로마의 휴일은 왜 그리도 아름다웠는지

야간 비행을 하는 생떽쥐 뻬리의 머플러가 왜 내 목덜미를 스쳐갔을까
?
바람과 함께 사라진 안개낀 장충단 공원

누가 울어 이 한밤 잊었단 말인가
?

그런데 가장 기억에 진하게 남는것은

견딜 수 없이 지금 이순간의 가장 자극적인 것보다도 더 마음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풍경이다
.

그저 너무 흔해서 관심조차 없는 풍경이 날 견딜 수 없이 흔들어 놓는다
.

먼지가 뽀얗게 쌓인 신작로변의 플라타나스 이파리
.
바람소리에 부숴지는 포플라의 작은 손놀림
.
미나리 밭의 거머리
.
조그만 텃밭둘레에 피어난 맨드라미
.
서늘한 기운마저 감돌던 여름날 대청마루
.
빨래줄에 널린 하얀 기저귀가 바람에 흔들린다
.

난 그것들을 기억할 수 없다
.
그것들이 날 알아 보아도 난 기억할 수가 없는 것이다
.
난 퇴락한 속세의 찌꺼기이기 때문에

그들을 반추해 내는 것은 죄악이다
.
그들은 다음세대에는 다음 기억으로 남을 것이기에

완전히 잊어야 한다.

회색 빛 아파트의 즐비한 군상
.
피카추의 변신
.
PC
방의 매캐한 내음
.
도시의 네온. 흐느적거리는 불빛. 고층빌딩의 밀림
.
흩날리는 여인의 향수
.
....

내겐 별로 익숙하지 않은 감상의 편린



이젠

디지탈 영상으로만 남고

영원히 기억할 수 없는 감각의 앨범은 계속 변색되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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