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아련함이 주는 간절함
<기억할 수 없는 것들> 2002. 12. 24 쟝르: 수필
언젠가부터
술을 마시면 글을 쓰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밀려오는 수많은 감상의 편린들이 나의 가슴을 후벼파내어
공허할 정도로 텅비어 버린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나는 두꺼운 노트를
열심히 채워 나갔다.
적어 놓지 않고는 견딜수 없었던 수 많았던 사연들...
그러나 지금은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
왜 그토록 나의 마음이 시렸는지가.
요즈음 술을 마셔도 아무런 생각이 없다.
그저 잠시 기분전환을 위해 그냥 마신다.
별로 흥분하지도 별로 취하지도 않는다.
취하는 것도 별로다.
취해보았자 한다는 짓이 더욱 자극적인 쾌락의 터널로 들어가는 일뿐이니.
만일 내가 옛것을 다 기억해 내면
난 옛날 습관처럼 술을 마시면 울겠지.
도무지 견딜 수 없이 멍뚫린 가슴 부여안고 울게다.
그래서 다행스럽게 나는 마음을 놓는다.
내가 아직도 그런다면 내 아이나 주위의 많은 사람이 힘들테니...
기억할 수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오늘
내가 기억할 수 없는 것(?)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여섯 살
엄마의 월남치마폭을 붙들고 시장통을 따라 다닐때
어머니께서 팔던 쿨민트 껌의 향기가 도무지 견딜수 없이 강하게 느껴진다.
바람은 차고 생선비린내가 진하게 퍼진다.
열두살
개천가 모래사장에서 넓다란 삽으로 모래를 퍼올리던
아버지의 굵은 팔뚝과 힘줄. 강변의 풋풋한 물내음. 적막한 푸른하늘.
열일곱
정액냄새 풍기는 다락방에서
온갖 만화와 플레이 보이 잡지로 세월을 보내다 심심하면
무협지도 읽고 데미안도 읽었지.
근데 왜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은 날 늘 불안케 했을까?
내 스믈즈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기을 바라면서도
왜 늘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어도 가슴에는 하나가득 슬픔뿐이었을까?
왜 태양은 가득히 떴는지
로마의 휴일은 왜 그리도 아름다웠는지
야간 비행을 하는 생떽쥐 뻬리의 머플러가 왜 내 목덜미를 스쳐갔을까?
바람과 함께 사라진 안개낀 장충단 공원
누가 울어 이 한밤 잊었단 말인가?
그런데 가장 기억에 진하게 남는것은
견딜 수 없이 지금 이순간의 가장 자극적인 것보다도 더 마음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풍경이다.
그저 너무 흔해서 관심조차 없는 풍경이 날 견딜 수 없이 흔들어 놓는다.
먼지가 뽀얗게 쌓인 신작로변의 플라타나스 이파리.
바람소리에 부숴지는 포플라의 작은 손놀림.
미나리 밭의 거머리.
조그만 텃밭둘레에 피어난 맨드라미.
서늘한 기운마저 감돌던 여름날 대청마루.
빨래줄에 널린 하얀 기저귀가 바람에 흔들린다.
난 그것들을 기억할 수 없다.
그것들이 날 알아 보아도 난 기억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난 퇴락한 속세의 찌꺼기이기 때문에
그들을 반추해 내는 것은 죄악이다.
그들은 다음세대에는 다음 기억으로 남을 것이기에
완전히 잊어야 한다.
회색 빛 아파트의 즐비한 군상.
피카추의 변신.
PC방의 매캐한 내음.
도시의 네온. 흐느적거리는 불빛. 고층빌딩의 밀림.
흩날리는 여인의 향수.
....
내겐 별로 익숙하지 않은 감상의 편린
이젠
디지탈 영상으로만 남고
영원히 기억할 수 없는 감각의 앨범은 계속 변색되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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