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예전에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던 시절
뭔가 기록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던 시절에
피눈물 흘리듯 써 놓은 글들이 있었다. 꼭 내 이야기는 아닐 수도 있지만 그냥 나의 감정은 100% 일치하던
그런 느낌을 어설픈 작품으로 만든 적이 있었다. 혹시 대단한 작품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막연한 희망과 함께...
올리고 싶었던 작가 사이트가 폐쇄되고 어느덧 상상보다는 진일보한 사진이 덧붙다보니 읽는 것이 귀찮을 지도
모르겠으나 놔둘곳 없는 글을 숨쉬며 살라고 잠시 보관키로 한다.
<샤워를 하며> 2002. 12. 16 쟝르: 수필
1박2일의 송년행사를 마치고 지친몸을 이끌고 집에 왔다.
회사의 잔무가 걱정이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아 그냥 적당히 정리하고
일찌감치 돌아왔다.
헝클어진 머리
깍지못한 수염, 꼬질꼬질한 몰골-
모처럼 꺼냈던 스키장비등의 짐을 간단히 정리해 놓고 몸을 씻는다.
추운 겨울날씨지만 꼭지 하나만 돌리면 금방 쏟아져 나오는 온수.
모락모락 김이 솟아나는 따뜻한 물은 모든 피로를 씻어내주려는 듯
세차게 온몸을 때려준다.
늘
샤워를 할때면 난 감사드린다.
이토록 편하게 세상을 살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하느님과 배관공께.
비록
늦은 나이에 조그만 아파트를 구입했지만
세식구 살기에 나로서는 충분한 행복공간을 느끼고 있다.
주거환경을 과시환경으로 바꾸려는 사람들에게는 코딱지 만한 집이겠지만
내게는 늘 여유있고 넉넉한 느낌이다.
더이상 내게 주어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남의 것이겠지.
목욕을 하려면
한참을 기다려 명절때나 하던 시절도 바로 엊그제같다.
그나마 목욕탕이 먼곳에 있을땐 부엌에 뜨거운 물을 끓여서 큰 통에 받아 놓고 찬물을 적당히 섞어서 씻곤 했다.
부엌문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삭풍에 몸서리를 치면 온몸에 거칠하게
소름이 돋곤했었다.
그래도 재미있던 것은 몰래 목욕장면을 훔쳐보는 틈새가 있었다는 것.
여름밤. 더위에 시달려 잠못들때,
어디선가 시원스레 물을 끼얹는 소리가 들리면 몰래 도둑고양이가 되었다.
담벼락 너머 우물가에 쪼그리고 속곳을 적시는 아낙네들이 있었기에.
시원스레 출렁이는 가슴은 늘상(?) 보던 물건일지라도
물에 젖은 속옷에 어슴프레 비치는 알몸은 뜨거운 사춘기의 몽정기였다.
서울로 이사하여 중고등학교에 다닐때는
늦은 밤에도 화계사 뒷산에 오르곤 했다.
삼성암 못미쳐에 목욕을 할 만한 곳이 몇군데 있기 때문이었다.
여럿이 같이 갈때도 있었지만 어떤때는 그냥 혼자 오르기도 했다.
고즈넉이 옷깃을 늘어뜨린듯 달빛이 애무를 해오는 날도 있지만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부엉이 소리만 요란한 날도 있었다.
그런날이면 산오름녘에 있는 주인없는 묘가 늘 무서웠었지.
무더위을 떨쳐버리고 몽정기를 학습기로 바꾸기 위해
맑고 시원한 물에 온몸을 담그고 콧노래를 부르다 보면
내가 바로 신선이었다.
요즈음은 목욕을 하면 아마 국립공원훼손죄가 되는 모양이던데---
암튼 더운여름 목욕할 곳조차 없던 미아리 달동네시절에는
사흘에 한번정도는 산속의 목욕터에 오르곤 했었다.
내려오다 보면 다시 몸이 땀에 젖을지라도 달리 샤워할 방법이 없었다.
부엌도 밖으로 나있던 집이었고 공동으로 사용하는 푸세식 변소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두세평도 안되는 방두칸에서 어떻게 일곱식구가 다 살았었는지
의아스럽기도 하고 그곳에서 사춘기를 보낸 여동생 둘다 어찌 컸는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
지금은
모두 꼭지만 돌리면 쏟아지는 냉온수를 즐길 수 있는 상황이다.
우리 식구들만 잘 살게 된것이 아니고 세상이 그렇게 행복하게 바뀐것이다.
근데 우리는
돌려도 돌려도 나오지 않는 욕망의 샤워꼭지를 자꾸 찾고 있다.
그냥 샤워꼭지로만도 행복할 수 있을 텐데도 말이다.
<어디 아프세요? 1 > 2002. 12. 18 쟝르: 일기
많은 사람들이 늘상 아픔을 얘기한다.
죽음을 앞둔 극한 공포의 암에서 부터 죽음에 이르는 병 불안까지.
여러종류의 아픔이 있다.
아픔은 가급적 안겪고 싶은 일이건만 어쩔 수 없이 찾아오며 또한
필연적으로 겪어야만 하는 일로 체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아픔을 완화할 수 있다면 노하우를 공유하는 것이 어떨까?
급체에는 역시 손가락을 따주고 모자라면 발가락까지 따주면 좋다.
따는 요령은 바늘로 과감하게 푹 찌르면 된다. 뭐 등을 두들겨주고
손가락에 실을매고 하는 것은 다 소용없는 요식행위이다. 결론은 사지에서
피가 돌도록 자극을 주는데 있다. 괜스레 세균옮을까 걱정되면 라이타로
바늘을 지져주면 된다.
너무 무성의 한가?
가끔 먼저간 사람이 이야기 해준다.
어느 길이 막히니 어디로 가는 것이 좋을듯하다고.
그런데 그말이 다소 미심쩍어 막히는 길로 기어이 갈때도 있다.
어쩌면 그가 알려주고난뒤 교통량이 바뀌었을 지도 모른다고 자위하며---
많은 사람들이 아픔을 겪지 않도록 수 많은 조언을 해주고
고통속에서 벗어나도록 도움을 주는 처방까지 해주건만 우리는 늘 아프다.
혹시 아마도 아프고 싶어서가 아닐까?
---- 왜 아프고 싶을까?
눈물젖은 빵을 먹지 않고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하여 그럴까?
아니면 자신의 몸속에 자신을 역행하는 또다른 자아가 있어서 일까?
가끔은 아프지 않으면 두들겨 패서라도 아파지려는 사람도 있으니.
술을 마시고 아픈 사람,
담배를 피우고 아픈 사람,
사랑을 쏟아부어서 아픈사람,
선택이 싫어서 엉뚱하게 아픈사람.- 어려운 용어다. 이것은 아이들이
학교에 가기 싫어서 배가 아픈 것과 같은 이치다.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은 바로 스스로 아프게 하고 스스로 고통받는 아이러니칼한 부분이다.
자신을 무척이나 질책을 하고 열등감에 빠지게 하고 모질게 대한뒤에
그 아픔으로 몸부림치는 자신을 보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통증에 대해서다.
아마도 새디즘과 매저키즘이 공존하는 듯한 이중적인 성격의 통증말이다.
위장병의 80%는 신경성이다.
밥먹는 개도 건들지 않는다는 말은 아마 밥먹을때 조금만 심기를 건드려도
쉽게 체하며 고통을 받는 다는 것을 알고 선각자들이 해놓은 말같다.
위장은 우리의 얼굴처럼 쉽게 예민하게 붉어졌다 파래졌다하는 모양이다.
결국 마음이 편안하면 소화불량내지 소화계통의 질병이 80%완화된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다.
의사의 오진율은 약 50%정도 되는 모양이다.
자신없는 요즘 의사들은 손쉽게 진단하기위해 의료보험도 잘안되는 각종
검사들을 권유한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확신을 갖고 오진을 지금부터
내릴까 한다. 50%정도의 확률로.
그대의 지금 두통은 회사일, 집안일, 애정문제 때문이 아니다.
오랜된 편두통도 체질때문이 아니다. 그 원인은 잘못된 욕구때문이다.
프로이트적인 해석을 원용하는 듯 하지만 분명 골치가 아픈것은- 두통약을
먹고도 또 다시 아파오는 것은 성욕, 성취욕, 기타 본인조차 부인하려는
그 욕망 때문이다. 원래의 자신모습과 달라지려는 자신의 모습이 상충하는
과정이다. 네가 뭔데 그런 결론을 내리냐고?
그거야 아스피린을 한 웅큼씩 쥐고 다니면서 먹던 놈이 멀쩡하게 안 아플때
생각한 것이므로 권장하는 것이다.
우울증, 협심증, 부정맥, 뇌졸중, 신경통, 요통, 치질, 간장장애---
무엇이든간에 그 원인을 잘 찾아보면 엉뚱한데서 답이 나왔다.
우울증은 확률이 주범이다.
정충중 수억분의 일의 확률로 선택받고 태어난줄 알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60억명이나 선택받은 사람들로 세상이 그득하기 때문이었다.
신경성 협심증은 소심하기 때문이다.
심장기능이 나빠서 소심해진 것이 아니라 소심해서 심장이 나빠진 것이다.
그러면 소심증은 누굴 탓할까? 부모님 탓이겠지. 그러면 부모님은?
----조상을 웬수로 만들고 있구만.
소심한 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냥 소심하게 살든가 아니면
죽든가 해야할 것이다. 그런데 다행한 것은 소심한 사람은 절대로 깡다구
있게 자살을 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냥 소심하게 살아가기 마련이다.
아니면 소심치 않다고 증명하기 위해 죽어볼까?
소심한 사람은 금방 약이 오른다.
금방 얼굴이 울그락푸르락하고 금방 정의의 투사가 되기도하고 금방
비굴해지기도 하고 금방 굳은 결심도 잊어버린다.
많이 듣던 냄비근성이랄까?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약을 올린다.
구경하고 있어도 재미있기때문이다. 미국이 약오른 우릴 보고 있듯이.
소심증을 없애는 가장 빠른 지름길을 알려 주고 싶다.
사람은 자기 그릇이란 것이 있어서 작은 그릇 - 간장종지 같은 그릇을
가진사람이 큰 그릇처럼 놀아서는 안된다. 금방 담겨져 있는 양을 간파
당하기 때문이다. 그냥 소심하게 노는 것이다.
너무 소심한 사람이라서 사람들이 신경쓰지 않으므로 소심증으로 고민할
일이 안생기기 때문이다. 독설이라고?
소심한 주제에 자꾸 아니라고 우기니까 피곤한 것이다.
그냥 나는 소인배다! 라고 여러번 외치면 아무렇지도 않게 된다.
대범한 그릇이 되는 길도 잘 알고 있다.
그거야 물려받은 DNA탓이겠지만 그래도 품위있게 대답해 본다.
"에… 그것은 과외도 받지 않고 늘 교과서 위주로 공부해온 덕이지요.
취미는 등산이고 시간이 날때마다 독서를 즐깁니다. 또한 제 좌우명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고 늘 마음을 갈고 닦지요. 다 군대를 면제케해준
부모님 은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비아냥이라고? ---글쎄요.
일반적으로 대범한 사람들에게 소심한 사람의 고통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공감조차 불가능하다. 그러나 세상은 누구의 것도 아닌 공존의
마당이다. 함부로 잘난체 하다간 누구나 다친다.
조금 세상을 살다보니 소심한 사람들 덕에 세계평화가 유지되고 있슴을
느낀다. 대범한 분들은 오직 전쟁에만 관심이 있기때문이다.
이글에 번호를 매겼다.
지금 생각엔 정말 내 인생중에서 꼭 남겨 놓고 싶은 그무엇인가가 조금은
배어나올지도 모른다는 착각으로 아픔을 직시하고 도려내고 그럴까한다.
분명 누군가에는 더 생각할 시간을 벌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낭비를 막기위해 나의 긴 낭비를 보여주고 싶은 것같다.
<늘 고민하는 문제> 2002. 12. 22 쟝르: 칼럼
현대인은 옛날 사람들에 비하여 훨씬 덜 위험하다.
마마, 호환, 화적떼에 시달리지도 않고 자연의 횡포앞에서도
아늑한 공간을 확보하고 TV를 즐기며 편하게 산다.
과거와 비교해 볼때 행복지수 100%이다.
냄새나는 거적떼기로 바깥문을 하고 세탁이란 엄두도 못낼 눅눅한 솜이불은
덮고 지낸지 얼마일까? 아무데나 방뇨하고 하수도는 전혀 없이 살던 구시대
일반 서민들의 삶이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아직도 일부 존재하고 있지만
늘 연탄개스가 언제 새어나올지도 모르는 구들장에 누워 방안에 떠놓은
물이 얼어붙어 있을 정도로 추운 집도 있을게다.
지금
대다수는 행복지수 100%에 살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별로 즐겁지 못하여 얼굴 찌푸리고 있는 나는 과연 무엇이 문젠가?
그것은 바로 경쟁때문이다.
이회창후보와 노무현후보와의 대결에서 노무현이 이겨야만 한다고
생각하므로 정몽준의 배신에 온갖 욕설을 퍼붓는 사람들처럼
나도 내자신과 늘 경쟁해야할 대상에게 조금이라도 뒤떨어지면 견딜 수
없이 불쾌하고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아니 이기더라도 사실 마음 편한 것은 아니다. 다시는 따라오지 못하도록
짓밟아 놓기 전에는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대역죄인을 무조건 3대까지 멸하지 않았던가?
미국이 볼때는 이라크나 북한과 같은 악의 축(?)은 무조건 멸족시키고
싶을 게다. 미국을 어느정도 격어본 사람들은 미국의 그러한 생각이
틀린것이 아니라 건전한 편이라는 것을 느낄 것이고 독일의 스킨헤드족도
잘 살펴보면 그럴만도 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우리나라 - 특히 반미감정이 극도인 상황에서
주장한다면 맞아 죽을 일일게다.
이상한 것은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미국이 옳고 게르만 우월주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이 옳은 것이다. 당연지사 우리나라에 우리가 몸담고 있으니
우리의 반응은 당연히 옳은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모순은 늘 우리곁에 존재한다.
자신의 12살 딸을 목사의 노리개로 상납하고도 하늘의 뜻이라고 우기는
어느 못난 종교광신도 부부의 모습도 그들의 입장에서는 자식도 하늘에
제물로 바치려는 충직한 신의 종일 뿐이다.
그런데 불쌍한 딸을 내가 데려다 키워주고 싶어도 친권을 그들이 포기하지
않는한 아이는 데려올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세상이 조용해지면
그 아이는 또 제물로 활용 되어 질지도 모른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늘 고민하는 문제도 마찬가지로 어떤 가치관에 따라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갈등이 많다.
그 누군가 대표이사가 되는 바람에 그 라인을 따라 승승장구하다가 갑자기
그룹의 막강한 권력으로 누군가 다시 그 자리가 바뀌게 되었을때
얼마나 피비린내가 날 정도로 그쪽라인이 다 죽어가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직장내 줄서기도 피곤한 일이다.
그냥 무덤덤히 살아가려면 너무 튀지도 말고 누구와 특별히 친한척도
않는 것이 좋다. 그런데 어떤경우에는 그런 관심조차 없음에도 내 화일에
적혀있는 입사경로, 혈연, 지연, 학연에 의하여 가능성이 있는 놈으로
찍힐때도 있어 그냥 평범히 살기도 힘들때마저도 있다.
그리고 직장내 평가라는 것도 참으로 재미있다.
어떤 잣대로 재는가에 따라 결과가 제멋대로 나오니 말이다.
물론 따지고 든다면야 자본주의가 몰고온 병폐이긴 하겠으나
미시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가치관은 가끔 양심과의 싸움으로 비쳐진다.
요즈음의 고민은
내부서의 무능한 사원을 어떻게 잘라내는가에 있다.
경쟁부서와 똑같은 업무를 행하는데 그쪽은 실적이 무척 뛰어난반면
인간성은 "0"이다. 그리고 결과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조직구성원도 그러한 선진주의 원리에 아주 잘 적응하여 무능한 사람이
가더라도 생존경쟁의 법칙을 금새 몸에 익힌다.
난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이 유능하고 부지런하며 회사에 기여를
많이 한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있다.
그런데 나의 부서는 연장자가 많고 아주 푸근한 분위기다. 그중 특히
나이가 많은 강원도 아저씨가 친목회같은 직장분위기를 아주 잘 만든다.
내가 막내동생뻘이어도 아주 잘 따라주고 다른 나이어린 동료들과도
격의 없이 지낸다. 그러나 실적은 평균이하이고 그 영향을 받는 다른 후배
직원들의 성적도 하향평준화이다. 메기를 한마리 집어 넣어봐도 미꾸라지
에게 오히려 먹혀 버린다. 전국적 평균으로 보면 보통수준일지라도
늘 불안하다.
가끔 본사에 공정경쟁을 위해 제안하고픈 것이 있지만 그냥 말아버린다.
왜냐면 잘나가는 놈이 하면 제안이고 못나가는 놈이하면 불만이기에...
격주토요휴무를 잘 지킵시다!
하루 근무시간을 12시간 내로 제한합시다!
최초 납입금을 비밀리에 대납토록 하는 것을 막읍시다!
거래처에 흑색선전으로 타 부서를 모함치 않도록 합시다!
단순한 판매이익외에 무형적이익도 평가에 반영합시다!
......
착한사람이 강한사람이 되어야 하고 강한 사람이 착한사람이어야
세상이 잘 되겠지만 지금 현실에서는 의미가 퇴색되었다.
다시 표현한다면
옳은 사람이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강한 사람이 옳아야 한다
가 현실을 지배한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옳다는 것의 관점이 과연 인간의 양심에서 옳은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이익에서 옳은 것인지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어쩔수 없이 나는 내일 그에게 이렇게 말하려한다.
벌써 몇 번을 연습하고도 못하고 있는 말이지만 말이다.
"박형! 내년에도 월평균 목표를 100% 하지 못하면 계약을 해지 할거요.
나도 더이상 기다릴 수는 없어요!"
하지만 내자신의 내년연봉책정이 벌써 경쟁부서의 5년 후배보다도 적은
상황에서 그리고 여러 측면에서의 불리한 평가를 받고 있는 처지에서
아마 내가 먼저 지방부서로 내려갈 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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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1
제목 : 어디로 가야 합니까?
완성일자 : 1996 년 5 월경
최 종 찬
天上天下唯我獨尊
나도 내가 왜 이러는 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마음 한 구석에 여전히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음을 시인치 않을 수 없다. 젠장, 원치도 않게 집 앞에 던져 놓은 울어 젖히는 아이를 볼 수 밖에 없는 사람의 심정이라고나 할까? 그렇지만 이제와서 후회하거나 핑계를 대고 싶지는 않다. 어쨌든 다 끝나 버린 일이니까.
70년대 초반인가 POP SONG 중에 EPITAPH라는 노래가 있었는데-킹 크림슨인가 하는 가수가 5분도 넘는 길이로 부른 노래인데- 그 내용 중에 “Confusion will be my epitaph---" 라는 구절이 있었다.당시에는 그냥 노래가 좋아서 그저 그렇게 불렀는지 모르겠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 내용은 점점 더 나의 마음 속에 공명하게 되었다.
나는 누가 뭐라 해도 천재라고 믿는다.
아니 천재가 되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실로 어처구니 없을 만큼 또렷한 기억들이
나를 나에게 그렇게 믿도록 강요하는 것이다.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내 말을 믿어 달라는 의미로 라도 나는 고백할 것이다.
“뭐 이런 꼬마 녀석이 천자문을 다 외운다고?”
할아버지께서 나를 안아 키우시면서 심심풀이 겸 자장가 겸해서 불러주시던 천자문이 나의 의미없는 넋두리에 자리잡은 것은 아마도 나의 큰 머리통(바꿔 말해서 32비트라고나 할까?)속에 TV선전 등이 자리잡지 않고 있어서 너무도 쉬운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주위사람들에게는 대단한 일로 여기는 듯 했다.
“아니 3살 밖에 안된 아이가 어떻게 그럴 수가?” “읽는 것은 둘째치고 쓸 줄도 안대요 글쎄.” “애가 신퉁방퉁일세, 어쩌면 이럴 수가 있을까?”
사람들은 나를 보면 신기한 동물(신동?) 보듯이 쑤근 거렸고 자기들의 아이와 비교하여 괜스레 그들을 나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나의 관심사는 할아버지가 천자문을 외울 때마다 주시곤 했던 곶감이나 강정들 이었지 결코 공부는 아니었다.
어쨌든 나는 세 살 때부터 나를 선망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남들이 보고 있지 않으면 귀여워서 뽀뽀를 해 주거나 아니면 어떻게 해부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듯한 눈초리로 보여지는 일에 상당히 익숙해 지게 되었다. 그들의 순진한 욕구를 손상시키고 싶지 않아 나는 가끔씩 묘기를 준비해야하는 스트레스는 있었지만 그것은 상당히 즐거운 숙제이었다.
4살 때 한글을 완전히 읽고 쓰게 되어 동네방네 소문이 난 것은 만화가 재미있어서 보기
시작한 덕이지 결코 자랑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붓글씨를 너무 일찍 가르쳐 주신 덕에 한지에 몇 자 끄적 거린 것이 신문에 실리고 앞집 순득이 누나 연애편지 써준 일이 그렇게도 크게 번질 줄은 몰랐었다. 덕분에 나는 읽고 싶지 않은 6학년 국어 교과서를 TV 카메라 앞에서 읽고 본의 아니게 여기저기 불려 다니게 되었다.
이 얘기는 하고 싶지 않지만 나를 신기한 동물처럼 보는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 싶어서 한마디 해야 겠다. 내가 그저 남들이 박수만 쳐주면 그저 신이 나는 그런 별종이 아니라
진실로 세상을 빨리 배우고 있을 뿐 인격이 없거나 본능이 없는 그런 기능적 개체가 아니
었다는 사실을.
나는 어머니를 빛 바랜 사진에서만 보았을 뿐 기억을 할 수가 없다. 나를 낳고 몇 달 안되어서 결핵으로 피를 토하고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젊은 여자의 체취를 무척 그리워하게 된 것 같다.
네 다섯 살 때에도 앞집 순득이 누나가 안아 주면 그 품에서 떨어 지지 않으려고 꼭 부둥켜 안던 감촉은 아직도 나의 피부에까지 생생하다.다른 상황과 마찬가지로 나에게 있어서 모든 진행은 공평했는지도 모르겠다.
육체적인 성숙은 물리적으로 어쩔 수 없었더라도 심리적으로는 나는 사춘기를 맞고 있었으니 말이다.
거의 할머니와 함께 지내 오면서 나의 성적관심은 자꾸 다른 젊은 여자들에게로 옮겨가게 되었고 실로 남들이 생각하기 힘든 기행도 서슴없이 시도하게 되었다.
“아니,무슨 아이 고추가 이래. 벌써 어른처럼 되가네”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목욕탕에서 아주머니들이 몸을 추스르며 망측한 듯 쳐다보던 눈초리 때문에 나는 4살 때부터 여탕출입에서 짤리고 말았다.
가장 아쉬웠던 점은 시내 캬바레에 다니던 예쁜 누나들을 볼 수 없게 된 점 이었으나 나중에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게 되는 계기로 바뀌게 되었다.별로 바람직한 일이 아닐지라도----
리비히의 최소율의 법칙을 나는 여러 곳에 적용시키긴 했으나 가장 정확하게 말하고 싶은 것은 나에게 있어 오직 나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한 부분만 제외하고 모든 것이 너무나 빨리 진행이 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젠장. 그러나 그 한가지 때문에 나는 항상 아기 취급만 받아 왔고 결국 손해 보면서 지내 온 세월이 되고 말았다.
10살에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방송에서는 나의 아기 모습까지 빼놓지 않고 잘 내보내 주었고 과거의 시시콜콜한 잘난 척 까지 모두 더욱 부풀려 과장될 만큼 잘 해 주는 것에 한동안 기분이 좋았다. 몇 군데에서 장학금을 보내 주기도 했다. 어머니가 안 계실 뿐이지 집이 가난한 것도 아니었으나 괜스레 동정심들을 보여 주느라 애들 쓰신 것 같다.
할아버지는 군수나 도지사의 격려금에 아주 기뻐하시는 눈초리 셨다. 아버지가 아직도 만년 주사의 직함을 벗어 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지 공적인 컴플렉스가 있으셨던 것 같다.
4년 빠르게 입학한 중학교 생활은 나에게 엄청난 즐거움과 함께 여러 고통도 안겨 주었다.
즐거움이란 항상 그렇듯 잘난 척하는 천재성에서 온 것이 아니고 같은 중학생이라고 나를 중학생처럼 대해준 동급생들과의 어울림이었다. K중학교는 경북에서는 가장 좋은 학교였고 교장선생부터 모든 선생들이 내게 지대한 관심을 보여 주었으나 나의 공부 진척도는 그리 흡족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의 관심은 공부가 결코 아니었고 세상이었으니 말이다.
세상! 원 세상에 ---
친구 녀석들이 가져온 미국 잡지를 보는 순간 나는 걷잡을 수없는 충동으로 밤잠을 못이루며 온통 세상이 거대한 유방과 시커멓게 생긴 거웃으로 뒤덮인 환상에 시달렸다.
머리도 아팠지만 온몸이 열병을 앓듯 끌어 올랐다. 묘한 쾌감이 전신을 휩쓸고 지나 가기도 하고
뒤엉킨 감정의 편린들이 제멋대로 날아다니는 것도 느껴졌다. 며칠간 몸살핑계로 학교를 쉬었다.
집에서는 병원에도 데려가고 귤껍질도 삶아 주었지만 내 병은 내가 잘 알 수 밖에-- 낮과 밤 구분없이 앓고 있던 언제이었는지 나의 몸이 공중에 뜨는 느낌이 들면서 갑자기이상한 오줌이 마려 왔다. 꾹 참으려 애를 쓰는 데 갑자기 캬바레 누나들과 앞집 순득이 누나가 어릴 때 목욕탕에서 본 것처럼 알몸으로 내게 다가와 몸을 부비는 것이었다. 기분이 짜릿짜릿한 것이 이루 말할 수 없게 좋으면서도 왠지 마음이 불안하고
답답해져 왔다.
손바닥으로 고추를 꼭 쥐는 순간 이상한 오줌이 찔끔 나왔다. 한 숨 다시 자고 난 뒤 나의 몸은 거뜬히 나았고 곧 학교에 다시 나가게 되었다. 그 뒤 6개월 동안 나는 영어 잡지로 공부를 했고 친구들은 내게 해석을 들으려 항시 교재를 잘 보급해 주었다.영어단어는 천자문보다 훨씬 쉬웠고 여름 방학 때는 TV에 나가서 미국 사람과 이야기 하는 프로에 특집으로 나오게 되었다.
TV에 나오는 것은 정말 신나는 일임에 틀림이 없지만 한 번 나갈 때마다 밤잠을 잘 수 없을 만큼 신경이 날카로워 싫었다. 너무나 많은 준비와 절차. 수없이 반복되는 질문들에 정말 짜증이 안 날 수 없었다.
그래도 나의 존재에 대한 확인은 오직 공적인 검증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처럼 숙달되어 가고 있었다. TV에 한 번 나오고 나면 한동안 모든 사람의 눈초리가 획일화 되어 있음을 느끼곤 했으나 캬바레 누나들까지 영향이 있을 줄 몰랐었다.
“얘, 너 조조 맞지?”
여름방학동안 뚜렷한 공부거리가 없어서- 실로 부여된 것은 엄청나게 많았지만 하기 싫은
것들 뿐이었다.- 32비트가 놀고 있었는데 새로운 유혹이 다가왔다.
“맞아, 얘 테레비에 나온 애가 틀림없지?”“정말 신기한 아이네.”
지루한 한 여름날의 오후가 막 시작하려는 찰나에 신선한 비누냄새를 풍기며 캬바레 누나들이 갑자기 내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나 나는 항상 관심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남들을 별로 의식치 않고 살아 왔지만 이상한 꿈을 꾸고 난 뒤부터 나는 순득이 누나를 보거나 우리 동네에서 가장 예쁜 캬바레 누나를 보면 괜스레 가슴이 뛰고 머리가 어지러운 것 같았다.
“애,너 우리에게 영어 공부 가르쳐 주지 않을래?”
“그래 말야. 저번에 만난 토마스가 자기네 부대에 놀러 오라고 했는데, 애한테 조금이라도 배워 가면 훨씬 낫겠다 그래.”
“까뎀,토마스라고해라. 재수없는 놈. 뻑 유!”
“그래도 마이클보다는 난 것 같은 데---”
자기들 끼리 실컷 조잘 대며 나를 데려간 곳은 그들이 제멋대로 살고 있는 여관골목 첫째
집의 넓은 방이었다.
가끔 동네 청년들이 이 쪽 골목이 잘 내려다 보이는 건너 언덕 배기에서 이들이 날이 더워 문을 열어 놓고 있을라치면 잔뜩이나 기대와 호기심으로 바라보던 그 신기한 방에 나는 특별 출입허가를 얻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내가 나이가 어린 탓에 그리 하였는지 전혀 몸가짐에 신경을 쓰지 않았고 나는 그 허술한 틈을 타서 나의 성적 만족감을 극대화 하는 일에 더욱 빠져 들고 말았다.
그리 멀지 않은 미군부대에 가끔씩 진출하던 그들에게 나의 영어 지도는 충분히 값어치가 있었고 나는 그들의 세상바닥에서 막 건져 올린 살아 숨쉬는 언어와 몸짓에 내 멋대로의 상상을 더해 제멋대로 즐거움을 누리게 된 것이다.
이러하듯 나는 제멋대로 돌출되는 성적욕망을 당연시 받아 들였고 그것을 은밀히 즐기게 되었으니 여러 갈등이 생겨 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쉬운 얘기로 나는 여러 측면에서 한 마디로 싸가지가 없었던 것이었다.
한 여름 밤의 꿈처럼 나의 음습하고 지저분한 몰래 즐기기는 할아버지의 귀에 나의 행각이 들어감으로서 끝나고 말았다.
천재의 고독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아마 이상의 열 세 번 째 아해가 그랬을까, 아니면 짜라투스트라가 그리 하였을까?
같은 종족이라고 똑같이 느끼며 살 것이라 누가 장담할 수 있으리오?
석가모니의 뜻을 정말 가섭존자가 느낀 것일까?
예수의 마음을 과연 베드로가 알 수 있었을까?
누가 조물주의 마음을 헤아려 그 뜻을 제대로 전할까?
나의 한 번 보면 잊혀지지 않는 이 불안한 능력을, 한 번 헤아려 보면 이면까지도 다 느껴져 버리는 재미없는 판단과 이해력을 누구에게 속 시원하게 말할 수 있고 느낌을 전달할 수 있으리오?
의사가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수술이고,판사가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판결이고, 가수가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노래이다.
천재가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천재성이다. 어디서부터 왔는지,앞으로 어디로 갈런지 아무도 천재 그 자신도 알 수 없는 그 고독성.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어느 날 갑자기 가고야 말 것 같은
위험천만의 지적갈등,너무나 선명하게 조명되는 천재의 눈부신 고독은 과연 누가 알아줄
것이란 말인가?
다만 나이와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편견 때문에 구속 받아야 하는 이 허황된 삶의 실 존재를 누구에게 몸부림치며 말해야 한단 말인가?
잠시 다시금 공부에 빠져 시간을 보냈다.
마음이 어수선하여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었으나 별로 할 일이 없다 보니 공부라도 하는 수 밖에---
중학교과정은 내가 한눈 파는 바람에 2년이나 걸렸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빠르게 진학하는데 아무런 매력도 느낄 수 없었을 뿐더러 이제는 아무 하고픈 일도 없는 느낌이었다.
잘못된 DNA구조 탓에 나는 시차가 전혀 맞지 않는 이상한 세계에서 이상하게 살아가는 가엾은 존재에 지나지 않을 뿐---
갈등과 방황의 나날이 시작되었다.
제멋대로 돌출되는 성적욕망부터 시작해서 인간의 내면적인 갈등까지 인생에 있어서
생각해야할 모든 일들은 모조리 나의 중앙처리장치 메모리에 상주할 채비를 갖춘 것이다.
아무런 진척이 없었다. 나의 이 좋은 머리로 왜 해결이 안 되는 문제가 이리도 많은 것인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장 손쉬운 문제인 내가 존재하는 이 우주의 끄트머리가 도대체 어디 있는지조차 모르며
존재하는 아이러니부터 시작해서 이세상의 가장 작은 미립자는 과연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그냥 남들의 박수소리로 연명해 나가기에는 너무도 인생이 불쌍하여 나는 많은 일들을 접어 두었다.
조금만이라도 불확실한 것에 대하여는 검증을 거치지 않고는 아무 것도 믿을 수 없게 된 것이다.어떤 일이든 정확히 정립되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았다.
사고의 용량이 커감에 따라 점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늘어만 갔고 어느덧 나는 카페인이 잔뜩 들어 있는 감기약,하루 커피 5잔 이상,아티반,발리윰,타임---젠장 이름을 기억하기도 싫은 수많은 매개 물질에 묻혀 지내기 시작했다.
머리가 천근만근 무거워져도 누구에게 이렇다 할 아무 말 할 수 없음이 너무도 나의 마음을 외롭고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나를 아껴 주고 나를 조금이라도 관심 갖고 봐주던 많은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은 가득했으나 달리 어떤 방도를 찾지 못하고 나는 점점 라스꼴리니코프나 짜라투스트라, 아니면 쇼펜하우어나 생떽쥐뻬리와 대화할 수 밖에 없었고 그들은 나의 말을 잘 들어 주었으나 그들의 의견을 말하는 법이 없는 또 다른 고독한 존재인지라 나의 가장 중요한 질문에는 답해 주지 못했다.
나의 생각주머니에 쳐 박아 둔 수많은 미제들이 그 부피를 더해갈 즈음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루에 손을 수 십 번씩 씻고 있었다.
인간의 불완전성보다 더 먼저 다가온 것이 인간의 추악한 욕망이었던 것 같다.
예수도 해결하지 못하고 석가도 전혀 해결해놓지 못한 이 세상의 평화는 알라신이나 삼신할머니도 당연히 해결하지 못할 일이고 라즈니쉬나 크리슈나 무르티 또한 해결할 수 없는
분명 가장 어려운 문제였으나 나는 해답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욕망,온갖 미명으로 치장했으나 그 뒤에 숨겨져 있는 더럽고 추악한 욕망이 존재하는 한 결코 평화란 올 수 없는 일이 틀림이 없는 것이었다.
욕망이 존재 하는 한 이 세상에 완전한 평화란 존재할 수 없고 어쩔 수 없이 투쟁이 생겨 날 수 밖에 없는 일 이라면----
갑자기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 들면서 우주 유영을 하는 비행사처럼 오직
본능에 의지한 삶의 마지막 끄나블에 온 몸을 맡기고 나의 몸은 떠돌기 시작했다.
갑자기 밀려드는 삶의 회한으로 나의 몸과 마음은 열병으로 들뜨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나의 모든 일상은 무가치와 함께 점점 뭉쳐져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었고 대신자리 잡은 세계는 피카소의 그림과 펑크그룹의 노래처럼 난해한 세계의 표출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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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중퇴했다.
고등학교도 중학교와 같은 재단이었기에 별 문제 없이 진학 했으나 1년간의 수업이 진도는커녕 제자리 걸음 조차도 못하는 수준에 머물자 다들 천재의 한계라는 둥 당구는 쓰리쿠션에서 다 만난다는 둥 하면서 적잖은 핀잔을 주다가 급기야는 아버지가 학교에 몇 번 인가 다녀가신 뒤에 소리없이 나의 학적부는 정리 되고 말았다.
14살의 어중간한 나이에 나는 갑자기 실업자가 되었다.
K고등학교에는 영재 교육프로그램이 정식으로 설립이 되어 있지 않으니 더 이상의 관심을 기울일 능력이 못되어 미안하다는 담임과 교장의 설득력없는 설명을 곱 씹어 보며 나는 생존개념을 새롭게 느꼈다.
언제나 값어치를 겨루어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생존의 원리에 의거하여 나는 더 이상 상품가치가 없음에 스스로 책망하면서도 마르크스의 책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1년 정도 쉬고 난 뒤에 비슷한 나이의 아이들이 다시 고등학교 들어갈 때 다시 고입을 하든가 아니면 검정고시를 봐서 대학을 곧 바로 진학하라는 주위의 여러 충고는 이제 더
이상 색다른 흥미거리가 되지 못하는 나의 육신에 대한 고문이었다.
할아버지가 몸 져 누운 지 석 달도 못되어 돌아 가셨다.
아버지는 무엇이 못 마땅하셨는지 점점 폭음의 횟수가 늘어만 갔고 나의 모든 행동에 대해 자주 잔소리 했다.
할머니는 기침을 많이 하시면서 몸의 기력이 급격히 쇄진하는 것이 역력하게 눈에 띄었다
.
집에 있으면서 김치 담그는 법과 메주 뜨는 방법까지 배웠다.
이제는 TV에서도 아무런 관심이 없어서 김치 담그는 방법은 방영되지 않았고 나는 쓴 웃음을 지으며 점점 시니컬한 미소를 몸에 달고 다니게 되었다.
진정한 천재는 아무도 모른다.
남들이 천재라 부를 때 그대는 그들의 꼭두각시일 뿐.
엄청나게 공부해서 대단히 출세한 뛰어난 사람들이 겨우 한다는 일이 아주 지저분하고 더럽고 추악하게 돈과 권력을 쥔 사람들의 하수인의 일을 할 뿐이지 너희가 하는 일이 뭐가
있는가 말이다.
남들이 천재,영재라고 떠들 때 그대는 스스로 도취되어 웃겠지. 남들이 그대를 추켜세워
그들의 목적과 영리에 써먹는 줄도 모르면서 세상에서 제일 잘난 사람인양 우쭐거리며
그댄 천재의 기쁨에 도취되어 살아 가겠지. 불쌍한 사람---
그리하여 나는 천재로부터 벗어 났다.
나는 천재가 아니다. 진정한 천재이기 때문에 나는 천재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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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아파 왔고 가끔 시공을 초월한 느낌이 전신을 휘감고 가면 집인지 병원인지 알 수없는 혼동의 공간 속에서 나는 존재의 초라함 때문에 울고 신과의 게임에 져서 울고 계속 울었다.
한번도 본적이 없는 엄마의 모습이 떠올라 왔다. 처음으로 느끼는 마음의 평화도 있었고
억누를 수 없는 격정에 온몸을 쥐어 뜯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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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나의 의식 속에 모든 영상들이 희미하게 오버랩되어 모든 것이 잘 분별이 되지 않았으나
우리 집은 성남으로 이사를 왔고 아버지는 구멍가게를 하고 있었다.
나의 수족은 감각이 너무 느려져 밥을 입에 넣는데도 무척 많은 시간이 걸려서 그냥 입에
밥그릇을 쳐 박고 먹는 것이 편하게 되었고 옷을 입으려면 팔다리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무슨 생각인가 하려고만 하면 고장난 영사기의 필름처럼 모든 화면이 직직거리며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누군가 방문을 드르륵 여는 소리가 난다.
“늬 아버지 어디 가셨는지 아냐?” 왠 나이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얼굴은 아무리 보려고 해도 보이지가 않았다.
“하긴 너에게 물어보는 내가 미친 놈이지--- 허구한 날 술만 먹고 다니는 것도 이해가 가지. 저런 자식새끼 두고 어디 마음 편할 날이 있겠나? 쯧쯧---”
불쌍한 아버지에 대해 나는 이해가 갈 듯도 했으나 아무리 애를 써도 머리 속 한 부분에서만 어떤 공명이 있을 뿐 전혀 말로 표현되거나 몸으로도 움직일 수 없음이 무척 괴로웠다.
그러나 나는 확고히 한가지 해야 할 일이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밥 먹고 똥싸며 이 즐거운 세상을 살아야 겠다는 것이다. 분명 나의 사지와 얼굴이 뒤틀리고 뭉그러져 있을지 몰라도,남들이 죽지 살아 무엇하려냐고 묻는다 해도 나는 모처럼 원래 자연이 부여한 그런 감각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으니 분명 살아야
겠단 말이다. 갑자기 난 즐거운 기분이 다시 찾아와 마구 날뛰었다.
“아흐,어버버버--” 똥을 온 방바닥에 퍼질러 싸놓고도 배설의 기쁨으로 온 몸을 떨며 소리 쳤다.“쿠오바디스 도미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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